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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백성들은 정말 반겼을까?

by ssol39 2025. 9. 24.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당시 백성과 양반층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배경, 양반들의 반발, 그리고 백성들의 실제 수용 과정을 통해 그 진짜 의미를 살펴봅니다.

훈민정음 창제, 백성들은 정말 반겼을까?
훈민정음 창제, 백성들은 정말 반겼을까?


1.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초기, 백성들은 어려운 한자 때문에 글을 배우기 힘들었고, 자신의 의사를 기록하거나 전하는 데 큰 제약을 받았습니다. 세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443년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했습니다.

훈민정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문자였습니다. 배우기 쉽고 쓰기 간편해, 문자 생활의 문턱을 크게 낮췄습니다. 이는 곧 "백성을 위한 문자 혁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실제 반응은 단순히 ‘환영’이라고만 하긴 어려웠습니다.

양반층의 반발과 "언문"이라는 멸칭

훈민정음 창제가 발표되자, 일부 집현전 학자들과 양반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동안 한자와 학문을 독점하며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던 양반들이, 누구나 쉽게 배우는 문자의 등장을 위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최만리 등의 상소에는 “중국의 문자를 버리고 새로운 문자를 쓰면 오랑캐 취급을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쉽게 배워 신분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불만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훈민정음은 한동안 ‘언문’이라 불리며 천한 글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양반 사회에서는 한자 사용이 지배적이었고, 훈민정음은 여성과 서민만 쓰는 글자로 한정되기도 했습니다.

2.백성들의 반응과 훈민정음의 확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여성과 평민들은 훈민정음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훈민정음을 활용해 편지를 쓰고 가사나 소설을 기록했습니다.

민간에서는 판소리, 민요 등 구전 문화가 글로 정리되며 전해졌습니다.

홍길동전과 같은 한글 소설은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훈민정음은 초기에는 "하찮은 글자"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의 일상에서 빠르게 자리 잡으며 실용적인 문자로서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3.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훈민정음의 가치

훈민정음 창제 당시 백성들의 반응은 양반층과 크게 달랐습니다. 양반들이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훈민정음을 통해 글을 배우고 삶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문자 혁명이자, 민중의 언어적 자유를 보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문자로 자리 잡았고, 그 독창성과 과학성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세종대왕 문해상’을 제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를 만든 사건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과 문화를 바꾼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계층이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백성들이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오늘날 한국어와 한글 문화의 근간이 되었습니다.